휴식의 몽상
1.
여기 작가라는 존재가 있다. 세상의 모든 창조적 결과물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감추거나 드러내는 데 아주 적절하게 사용된다. 작가들은 자신의 심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인상들을 물질적 이미지로 포착해낸다. 만약 작품이라는 시각적 결과물이 단순히 물질과 이미지, 그리고 의미로만 이루어졌다면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노력은 쉬이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여기에 ‘작가’라는, 좀처럼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 결정적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에 원인과 결과를 주도면밀하게 갖다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라는 종(種)에게 작가라는 존재는 좀처럼 그 속을 알 수 없는 이상야릇한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미술 현장에서 글을 쓰는 나와 같은 이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다. 이들은 작가를 추궁하는 걸 즐기는 듯하다. 이들에게 작가와 작품이란 마치 일란성 쌍생아처럼 하나로 묶여야만 하는 존재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공식을 완성시키기 위해 화단의 유행과 남들이 만들어 놓은 담론이라는 필터를 작동시킨다. 그런데 정작 작가는 너무도 초연하다. 그들에게 작품이란 단순한 호기심의 결과이다. 물론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세상을 향한 도전과 응전이라는 거창한 결과일 수도 있다. 상관없다. 그들은 그럴 권리가 있다. 바슐라르가 지적했듯이 작품이라는 물질성을 통해 세상의 모든 상상적 호소들을 ‘체계화’하는 본능을 타고난 이들을 규정한다는 건 애당초 말이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2.
여기 상징이라는 존재가 있다. 작가가 만들어낸 상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연구가 필요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바슐라르를 인용해야겠다.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깥과 안쪽의 가치를 함께 알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봉하는 나로서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상징이 내포하고 있는 원형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징은 의식과 무의식이 절묘한 비례를 이루어 합쳐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의식이라는 영역에 천착한다면, 작가는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나서는 걸 즐긴다. 그들은 무의식에 침잠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알 듯 모를 듯한 무의식의 영역에 처소를 삼고 삶을 영위하는 이들도 많다. 작가들이 세상에서 찾아낸 인상을 몽상(夢想)이라는 말로 바꾸는 건 이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 지금 이 순간도 찾아 나서는 이미지의 원형은 꿈과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농축된 그 무엇일 것이다.
3. 여기 이고운이라는 작가가 있다. 그리고 <구름나무>라는 상징이 있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장지라는 뜻밖의 매체를 사용한다. 흥미로운 지점이다. 적어도 이것만으로도 그는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낸다. 생명의 원초성을 간직한 듯한, 그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어디론가 부유하게 만드는 이미지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형태라고 믿는 보편적 이미지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는 동안 차원(次元)의 문제로 확장된다.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그림나무라는 풍경의 극점은 숲이나 연못으로, 혹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신체의 이미지로 화(化)한다. 추측컨대 머리를 숨긴 그림 속 신체 이미지들은 무의식의 유영을 최대한 즐기려는 작가의 분신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이고운의 그림 속 상징적 가치는 다양하다. 그의 <구름나무> 앞에서 우리는 꿈속에 잠기게 된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이미지 너머의 이미지를 보게 되고,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그림 속에서 울려오는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작가의 심부에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호명’하는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아직은 풋풋한 젊은 작가의 체계화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휴식의 몽상을 달콤하게 만끽하기. 우리가 논증이라는 번잡한 일상에 시달릴 때, 작가 이고운의 느릿하면서도 소박한 꿈은 이렇게 영글어가고 있다.
윤동희 _ 미술 저널리스트, 북노마드 대표
1.
여기 작가라는 존재가 있다. 세상의 모든 창조적 결과물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감추거나 드러내는 데 아주 적절하게 사용된다. 작가들은 자신의 심상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인상들을 물질적 이미지로 포착해낸다. 만약 작품이라는 시각적 결과물이 단순히 물질과 이미지, 그리고 의미로만 이루어졌다면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노력은 쉬이 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여기에 ‘작가’라는, 좀처럼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 결정적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세상 모든 것들에 원인과 결과를 주도면밀하게 갖다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라는 종(種)에게 작가라는 존재는 좀처럼 그 속을 알 수 없는 이상야릇한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미술 현장에서 글을 쓰는 나와 같은 이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가 있다. 이들은 작가를 추궁하는 걸 즐기는 듯하다. 이들에게 작가와 작품이란 마치 일란성 쌍생아처럼 하나로 묶여야만 하는 존재다. 자신들이 정해 놓은 공식을 완성시키기 위해 화단의 유행과 남들이 만들어 놓은 담론이라는 필터를 작동시킨다. 그런데 정작 작가는 너무도 초연하다. 그들에게 작품이란 단순한 호기심의 결과이다. 물론 자신을 향해 밀려드는 세상을 향한 도전과 응전이라는 거창한 결과일 수도 있다. 상관없다. 그들은 그럴 권리가 있다. 바슐라르가 지적했듯이 작품이라는 물질성을 통해 세상의 모든 상상적 호소들을 ‘체계화’하는 본능을 타고난 이들을 규정한다는 건 애당초 말이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2.
여기 상징이라는 존재가 있다. 작가가 만들어낸 상징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연구가 필요하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바슐라르를 인용해야겠다.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깥과 안쪽의 가치를 함께 알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봉하는 나로서는 작가가 만들어내는 상징이 내포하고 있는 원형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상징은 의식과 무의식이 절묘한 비례를 이루어 합쳐진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의식이라는 영역에 천착한다면, 작가는 무의식 속에 묻혀 있는 이미지의 원형을 찾아나서는 걸 즐긴다. 그들은 무의식에 침잠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알 듯 모를 듯한 무의식의 영역에 처소를 삼고 삶을 영위하는 이들도 많다. 작가들이 세상에서 찾아낸 인상을 몽상(夢想)이라는 말로 바꾸는 건 이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 지금 이 순간도 찾아 나서는 이미지의 원형은 꿈과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농축된 그 무엇일 것이다.
3. 여기 이고운이라는 작가가 있다. 그리고 <구름나무>라는 상징이 있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장지라는 뜻밖의 매체를 사용한다. 흥미로운 지점이다. 적어도 이것만으로도 그는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낸다. 생명의 원초성을 간직한 듯한, 그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어디론가 부유하게 만드는 이미지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형태라고 믿는 보편적 이미지는 작가의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는 동안 차원(次元)의 문제로 확장된다. 작품의 뼈대를 이루는 그림나무라는 풍경의 극점은 숲이나 연못으로, 혹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신체의 이미지로 화(化)한다. 추측컨대 머리를 숨긴 그림 속 신체 이미지들은 무의식의 유영을 최대한 즐기려는 작가의 분신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이고운의 그림 속 상징적 가치는 다양하다. 그의 <구름나무> 앞에서 우리는 꿈속에 잠기게 된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이미지 너머의 이미지를 보게 되고,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그림 속에서 울려오는 메아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작가의 심부에 존재하는 이미지들을 ‘호명’하는 이 시간을 통해 우리는 아직은 풋풋한 젊은 작가의 체계화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을 통해 휴식의 몽상을 달콤하게 만끽하기. 우리가 논증이라는 번잡한 일상에 시달릴 때, 작가 이고운의 느릿하면서도 소박한 꿈은 이렇게 영글어가고 있다.
윤동희 _ 미술 저널리스트, 북노마드 대표